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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청년작가 - 12월 윤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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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01 ~ 12. 29.

전시장소 : 1층 로비

전시내용

윤 준 성

 

Yoon, Jun seong

 

 

 

 

Fragmentary thoughts6 small.jpg

 


​Fragmentary thoughts1, 72.7x53cm, Mixed media, 2015 

 

 

 

 

 

 

 

광주 출생

 

 

 

-학력

   순천 매산고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및 동대학원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2016 단상展 (다산미술관, 화순)

    2015 생각의 표현展 (도솔갤러리, 순천)

    2014 잎의 단상展 (DS갤러리, 광주)

    한일관展 (신세계 한일관, 광주)

    2013 윤준성 초대展 (가온갤러리, 고양)

 

-단체전

2016 트렁크 in ART PORT-新세계 TOUR展 (신세계갤러리, 광주)

     이달의 청년작가展 (군립미술관, 함평)

     Space-A展 (양림문화센터, 광주)

     제29회 한국화 동질성展 (예술가의집, 대전)

     김환기 국제아트페스티발 남풍展 (김환기 아트센터, 신안)

     광주 신진작가 5인 5색展 (라우갤러리, 경주)

     은밀한 담화展 (조선대학교 미술관, 광주)

 

-수상경력

2016 Space-A 젊은 예술가 상 (광주광역시 남구청)

2015 대한민국 한국화대전 특별상 (한국미술협회 광주광역시지회)

      조선대학교병원 공모 최우수상 (조선대학교 병원)

      무등 미술대전 우수상 (광주·전남 발전협의회) 

2014 대한민국 한국화대전 우수상 (한국미술협회 광주광역시지회)

      행주 미술대전 우수상 (한국미술협회 고양시지부)

      어등 미술제 특별상 (광주광역시 광산문화원)​ 

 

 

 

 

 

 

 

단상3 small.jpg
Fragmentary thoughts3, 91x72.7cm, Mixed media, 2015 

 

 

 

 

- 작가노트

 모든 작품 제작에 있어 표현하고 움직이는 주체는 감정이다.

본인은 주로 단상이란 작품명을 자주 쓰며, 

단상이란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조각들이 둥글게 모여 엉켜져 있는 모습,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원들이 본인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회, 즉 현재 인간관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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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ary thoughts2, 72.7x53cm, Mixed media, 2015 

 

 

 

- 평론

(김병헌)

 

 

 

 윤준성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갖고서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현대사회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파악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와 더불어서 이렇게 파악한 것들을 그가 어떤 예술적 방식으로 나타내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 역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그의 작품들을 보도록 하자. 그의 화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형태심리학(Gestatlt psychology)을 말하지 않더라도, 원형이나 타원형 등의, 물론 이런 형태들이 없는 작품들도 있지만, 모양일 것이다. 이것들은 때로는 하나만, 때로는 크기를 달리하여 여러 개로 각 작품들에서 보이는 것들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마도 그와 같은 원형이나 타원형의 형태 속에 들어있는 무수히 많은 조각들(또는 무정형의 작은 형태들) 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화면 곳곳에 배치된 작고 길쭉한 형태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과 현대사회는 과연 어떤 접점이 있을까.

 

 그 이전에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회(社會)’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모여서 만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어의 ‘소사이어티(society)’는 라틴어 ‘소키우스(socius)’에서 나온 말로 ‘동료’나 ‘친구’, ‘짝’을 뜻하는 것이었다. 즉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사회란 둘 이상이 모여 있는 어떤 상태나 모양을 전제하는 것에서는 비슷한 뜻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거듭될수록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회를 규정짓는 것 역시 천차만별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사회란 개별적인 존재들이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룹을 가리킨다는 것, 아니면 동일한 지리적 영역이나 사회적 영역을 서로 공유하는 그룹을 가리킨다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독일의 사상가인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급박하게 전개되는 시대적 상황을 겪으면서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였다. 필자는 여기서 그의 ‘다이어드(dyad)’라는 개념과 ‘트라이어드(triad)’라는 개념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짐멜이 말하는 ‘다이어드’란 숫자 ‘2’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듀오(duo)’에서 온 것이고, ‘트라이어드’는 숫자 ‘3’을 나타내는 고대 그리스어 ‘트레이스(treis)’에서 온 것으로, 그는 다이어드를 두 사람으로 된 그룹, 트라이어드를 세 사람으로 된 그룹에 연결시켰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다이어드 그룹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의 개별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즉 수적으로 이 그룹의 구성원은 같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란 개인 대 개인의 관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트라이어드 그룹에서부터 나온다. 여기서는 이제 더 이상 일 대 일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는데, 새로운 제3자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3자적 형식의 그룹에서부터 새로운 분열이 생겨나며, 그 이후의 4, 5, 6자적 형식들로 커지면 커질수록 개별적인 존재인 개인은 분리되고 고립되며, 분열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룹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나은 것으로 될 수도 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큰 그룹에서는 개인이 멀어지고 비인간적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보다 큰 그룹에 대해 개인이 저항하기 위해서는 가족처럼 보다 작은 그룹의 일원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간에 오늘날의 현대사회는 짐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해지고,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는 사회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볼 때는 유익한 부분도 있지만, 과거에 비해 무척 비인간적이되고 무미건조해진 면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사회적 부조리와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대사회를, 특히 다양화된 다원주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가? 바로 이 질문이 윤준성 작가의 작품이 던지고 있는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직관적으로 파악한 현대사회와 그 안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화면 위에 드러내 보인다. 화면 속에는 개별적인 존재인 개인들이 파편화된 조각들로 (때로는 무정형의 형상들로) 형상화된다. 이 조각들은 각각 하나의 개별적인 모습으로 독립성을 갖고서 훨씬 더 커다란 원형의 테두리 안에서 거주하기도 하며, 이러한 무리를 이루지 않고서 따로 따로 펼쳐져 있기도 한다. 또한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보다 먼 거리에서 몇 개의 원형들로 보이기도 함으로써 그의 작품들은 연결성과 확장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그가 나타내고 있는 형상들에 대해 좀 더 언급해보자. 작품 속의 형상들을 보면 어떤 것은 색종이를 가위로 오린 것처럼 반듯하게 되어있는 반면, 어떤 것은 손으로 찢어 놓은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은 꿈틀거리는 세포처럼 일정치 않은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의 형상들은 매우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처럼 추상적으로 그렸을까. 

 

 빌헬름 보링어(Wilhelm Worringer, 1881-1965)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주저인 <추상과 감정이입 Abstraktion und Einfühlung>에서 자연(여기서의 자연이란 사물, 사람, 사건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의 모방을 원리로 하는 자연주의 미술과 자연의 모습 중 어떤 본질이나 특징을 추출하여 재구성하는 추상미술에 대해서 논하면서, 자연주의 미술은 감정이입 충동에서 나오고 추상미술은 추상충동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그러한 감정이입 충동은 자연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올 때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럴 경우 우리는 친숙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추상충동은 자연이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다가올 때 일어나는 것인데, 이럴 경우 우리는 적대적인 자연을 변경시켜서 완전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보링어의 입장을 따른다면, 윤준성 작가가 바라보는 현대사회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불편하고 수정시키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것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필자는 그가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와 같은 형태로 그린 것은, 오직 그와 같은 형태로 그리지 않으면 자신이 파악하는 그 진실한 모습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판단하는 바이다. 따라서 윤준성 작가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에 대해, 즉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의 복잡한 관계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을 그것에 적합한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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